조선의 쇄락은 정조의 승하 후 바로 시작 됩니다.
강력한 왕권과 개혁을 부르짓던 정조는 그 당시 권문 세도가들에겐 자신들의 주권을 침해하는 하나의 적으로만 보였었습니다.
당시의 권문 세도가였던 집권층 즉, 양반들에게 정조는 눈엣 가시였습니다.
왕권의 강화는 집권 세력에게 많은 밥그릇을 요구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노론의 집권 중심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당시 양반과 천민의 평등과 인본을 부르짓던
위험한 사상인 천주학을 박해하고 서양 문물을 배척합니다.
왕이야 자신들이 들이고 싶은 사람을 앉히고 세도 정치의 장을 넓게 펼쳐 나갑니다.
이 후 권력의 세습과 당쟁으로 나라야 어떻게 되든 백성이야 굻든 말든 자신들의 안위를 살피는데만 급급해
외국과의 교류나 신지식 문물을 배우고 따르기는 커녕 철저히 배격합니다.
오로지 문물의 수입은 중국이며 그 중에 천주학은 싹 빼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천주학을 받아들이며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차츰 근대화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세도가에 의해 창출되는 강화도령 철종, 고종까지 철저히 뽑혀지는 왕들로 굴복된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원군이 주력 세도를 없애고 외척의 발호를 막는다고 철권정치를 하고 외척이 없는 민황후를 며느리로 들이나
철저한 대립 세력으로 불어나게 되지요.
아무튼 이러한 정치상황에 적자도 아닌 고종이 정권을 잡게 된다 한들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아버지 대원군과 민황후의 세력 중간에 끼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판국인것을...
더구나 당시 왕의 입장을 왕이 아닌 붕당의 최고 우두머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세도가들에겐
그 모습이 그리 중요치도 탐탁치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조선 말기에 급기야 그 세도가들이 자신들의 배후 세력으로 왕이 아닌 일본을 지목하고 충성을 하게 됩니다.
그게 조선 말기의 상황입니다.
따라서 고종의 밀사 파견 등 자주 독립의 지향은 고종에게 있어서는 많은 심적인 시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 등 외국에 밀서를 보낸것은 공화정이 아닌 왕정을 하는 나라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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