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1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1.21 침투로 안보견학장에서
김신조 목사가 1968년 1월 자신이 비무장지대(DMZ)를 통과한 과정을
육군 25사단 장병들에게 설명하고 있다.(자료 사진) ⓒ연합뉴스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한 북한군 특수부대 게릴라는 33명이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전향을 거부하다 남측으로부터 참수를 당했으며 이를 지켜본 2명의 게릴라가 충성서약을 하고 북으로 올라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북한군 124군 특수부대 게릴라 31명 중 김신조만 생포되고 30명은 사살됐다’는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과 다른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중앙선데이> 5일자는 124군 부대의 후신인 711부대에서 5년 이상 근무한 북한군 상좌(대령)급 출신 탈북자 홍은택(57·가명)씨가 이같은 증언을 했다며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침투조가 31명이 아닌 33명이었으며 △그중 두 명이 ‘참수(斬首·목 자르기) 협박’을 받고 남한 고정 간첩이 됐고 △이들은 ‘김일성에게 접근할 만큼 출세하라’는 지시를 받고 북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각각 북한군 상장(중장)과 중장(소장)으로 진급했지만 98년 신분이 드러나 사형됐다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홍 씨는 “내가 입대한 부대에서는 33명 남파, 2명 탈출로 기록돼 있다”면서 “대대는 곧바로 ‘33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 그 가운데 두 명이 탈출했다’는 부대 역사를 강의했다”고 밝혔다.
탈출한 두 사람은 임태영과 우명훈이었는데 이들은 북한에서 각각 초 경보병 훈련지도 총국장(별 셋), 총참모부 2전투 훈련국장(별 둘)이 되는 등 출세를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98년 돌연 둘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사형 당했다는 주장이다.
홍씨는 보위부에서 임태영을 취조했다는 사람 중 한명을 만나 ‘변절 과정’을 들었다며 관련 내용을 전했다.
임, 우 두 사람은 68년 당시 청와대 공격조와 떨어져 인근 주택가의 지붕위에서 후방을 감시하다 작전이 실패한 걸 알고 도주했지만 잡혔고, 남측은 ‘전향하라’고 했지만 이들은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죽이겠다며 작두를 가져왔고, 3명 중 조장이 계속 저항하자 머리를 넣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자 작두를 발로 밟았다는 것. 이를 본 임태영은 정신이 나갔고, 그래서 ‘대한민국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김일성에게 충성해 인민군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남측은 공포를 쏘며 쫓았고 두 사람은 따로 도망가 임진강을 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백동림 씨는 “처음 듣는 얘기”라고 반박했고, 당시 군 방첩대 소속으로 수사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학봉 전 의원(육사 18기)은 “말할 게 없다”고 전해왔다고 한다.[데일리안 = 서기원 객원기자]
이는 ‘북한군 124군 특수부대 게릴라 31명 중 김신조만 생포되고 30명은 사살됐다’는 지금까지 공개된 내용과 다른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중앙선데이> 5일자는 124군 부대의 후신인 711부대에서 5년 이상 근무한 북한군 상좌(대령)급 출신 탈북자 홍은택(57·가명)씨가 이같은 증언을 했다며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침투조가 31명이 아닌 33명이었으며 △그중 두 명이 ‘참수(斬首·목 자르기) 협박’을 받고 남한 고정 간첩이 됐고 △이들은 ‘김일성에게 접근할 만큼 출세하라’는 지시를 받고 북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각각 북한군 상장(중장)과 중장(소장)으로 진급했지만 98년 신분이 드러나 사형됐다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홍 씨는 “내가 입대한 부대에서는 33명 남파, 2명 탈출로 기록돼 있다”면서 “대대는 곧바로 ‘33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 그 가운데 두 명이 탈출했다’는 부대 역사를 강의했다”고 밝혔다.
탈출한 두 사람은 임태영과 우명훈이었는데 이들은 북한에서 각각 초 경보병 훈련지도 총국장(별 셋), 총참모부 2전투 훈련국장(별 둘)이 되는 등 출세를 거듭했다고 한다. 하지만 98년 돌연 둘은 ‘간첩 혐의’로 체포돼 사형 당했다는 주장이다.
홍씨는 보위부에서 임태영을 취조했다는 사람 중 한명을 만나 ‘변절 과정’을 들었다며 관련 내용을 전했다.
임, 우 두 사람은 68년 당시 청와대 공격조와 떨어져 인근 주택가의 지붕위에서 후방을 감시하다 작전이 실패한 걸 알고 도주했지만 잡혔고, 남측은 ‘전향하라’고 했지만 이들은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죽이겠다며 작두를 가져왔고, 3명 중 조장이 계속 저항하자 머리를 넣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자 작두를 발로 밟았다는 것. 이를 본 임태영은 정신이 나갔고, 그래서 ‘대한민국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김일성에게 충성해 인민군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남측은 공포를 쏘며 쫓았고 두 사람은 따로 도망가 임진강을 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백동림 씨는 “처음 듣는 얘기”라고 반박했고, 당시 군 방첩대 소속으로 수사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학봉 전 의원(육사 18기)은 “말할 게 없다”고 전해왔다고 한다.[데일리안 = 서기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