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초1때 선생님에 따귀 셀 수없이 맞아"
김태원은 30일 오후 방송된 MBC '황금어장' 코너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학교를 싫어하도록 만든 잊지 못한 사건을 공개했다. 김태원은 "어릴 적엔 굉장히 부자였지만 사업이 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교복도 얻어 입고 한 마디로 숙제도 안 하고 안 씻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지금으로 치면 왕따 같은 아이였다. 선생님도 무심했다"며 "한 번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칠판의 시작에서 끝까지 따귀를 맞으며 뒷걸음질 칠 만큼 셀 수 없이 맞았다. 그 일은 정신이 망가지는 문제였다. 큰 상처를 받았었다"고 고백했다. 김태원은 "그 후 그 조그만 아이가 학교 담벼락을 따라 큰 학교를 혼자 돌았다. 영화로 치면 한없이 슬프고 안타까운 장면"이라며 "집에서는 학교에 간 줄 알지만 들어가는 순간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내아들이니까 사랑을 받고 자라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그 첫날부터 제 인생의 잊지 못할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김태원은 "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학창시절 내내 병적으로 학교를 싫어했다"며 "그런 병에 걸려버린 거다. 학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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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가는 기사다.
부모의 사업 실패와 가세의 좌초...
정말이지 어린 마음에는 힘들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나도 어릴 때 그리 잘 산 것은 아니지만 동네에서는 가장 소비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병환과 그로인한 수 십 년의 간병...
당시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에 수 십 년간의 병원 입 퇴원...
한 번 입원 하면 약 1년씩...
그 기간이 수 십 년을 반복 해 왔으니 아무리 집안 기둥뿌리가 단단하고 튼실하다 하더라도 제대로 배겨날 수 있었을 런지...
내 눈에 큰 집이었던 보금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나 역시 김태원씨 처럼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나마 동네에서 가장 부유했었다 했는데 크레파스조차 살돈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너무나도 짜증이 나고 싫었다.
시험을 보면 무슨 문제가 코흘리게 어린애들도 아닌데 비누가 뜨거운 물에 잘 녹나 차가운 물에 잘 녹나 하는 이런 수준에도 없는 문제나 내고...
지남철에 붙는게 쇠일까요 흙일까요? 참 한심하고 우스웠었다.
그래서 죄다 반대로 쓰고. 옆 짝궁의 크레파스를 당당히 훔쳐다 내 책상 에 올려놓기도 하고...
아마도 그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어머니는 아버지 간병하시느라 병원에 계시고 형은 아직 하교 전이고 여동생은 기억이 안나고 막내는 우리 집 상가에 세 준 약국 아주머니가 키워 주시고...
그러던 중 선배집에서 공부를 하고 자다가 당시 유행했었던 연탄 개스를 나도 남부럽지 않게 맘껏 마셨었던 모양이다.
셋이서 잤는데 난 3일 만에 가장 늦게 깨어 났다니...
그리고 한 일주일 요양을 하고 학교에 등교를 했다.
당시 선생이름이 이영미라는 전라도 광주 출신 동양화를 하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시커먼 사람이었는데 늘 직경 5cm, 길이 4m정도 되는 몽둥이를 지니고 있었다.
아침 첫 수업 시간인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큰 몽둥이로 머리며 어깨며 등이며 온몸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안했는데...
니미 오살헐놈, 니미 떡칠놈, 니기 주게야! 염병헐놈. 너 땀시 우리 반 성적 떨어졌어야!!! 주게 부러!!! 주거!!! 주거!!!
김태원씨는 칠판 끝가지라 했지만 나는 교실을 돌아 도망가며 맞았다.
그 어린놈이 어디 그리 팰 때가 있다고...
그래서 그래 나 때문에 우리 반 고과점수가 떨어졌다니 만회를 해줘야 겠다 생각하고
환경미화도 스스로 나서 저녁 늦게까지 얻어온 잡지 사진 다 오려서 전지 용지에 붙이고 주석을 붙여 다 했고 당시 조금 흔했지만 아버지 병원에 문병할 때 가져온 국화꽃 다 모아 화분을 만들어 갖다 꾸미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당시 평균 90점 넘으면 시커먼 옥수수 빵과 함께 상장을 줬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 하길래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께 내일 상장 받아야 하는데 엄마 오시래요 했더니 좋아서 싱글벙글 하셨었다.
그런데 상장을 왜 어머니가 와서 받아 가셔야 하는지를 당시 나나 정신적 여유가 없으셨던 어머니는 알지를 못했었다.
다음날 어머니들 한 분씩 면담 후 담임 왈 누구는 성적이 90점이 안됐는데 반올림해서 상장 대상이었으나 학교에서 주지 말라 해서 줄 수가 없어 어머니 돌아가시라 한다.
그리고...
어머니들 다 돌아가신 후 조개탄 난로 뚜껑을 열고 내 상장을 거리낌 없이 쑤셔 넣는다.
그리고 도 시작되는 쌍소리와 몽둥이찜질...
니미 씨벌놈!!! 니미 오살헐놈!!! 니미 떡칠놈!!! 반올림해서 상장 받을려고 사기치는 놈!!!주게!!! 주게!!!
참!!!
체점을 내가 했나?
당시 난 반올림 없이 92점 내 친구는 90점이었는데 나는 사기꾼이고 친구는 상장을 받았다.
나도 한동안 학교 담을 돌았다.
무서웠다. 선생? 이런 인간도 선생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독사 같은 인간이 무섭고 염라대왕 같아 마주 할 엄두가 안났다.
그러던 중 하교 길에 당시 오후반이었던(그때는 애들이 너무 많고 교실이 모자라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했었다) 동네 친구가 내가 하교 한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냥 집으로 간다고 따라 나랑 같이 놀다 집으로 갔다.
다음날 동네 소문...
어린놈이 벌써부터 애를 꼬드껴 등교하는데 같이 놀자고 막았다 그래서 인간 말종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지네 엄마한테 혼날까봐 내가 꼬드껴 학교를 못가게 했다고 거짓말을 했었던 것이다.
내가... 왜? 당시 친구도 많았고 요즘처럼 왕따도 아니고 오히려 태권도 검은띠라고 약한 애 괴롭히는 애들 혼내주곤 해 오히려 애들 사이에선 인기가 좋았던 난데...
아무튼...
요즘 전교조라고 사회주의로 몰려가는 선생님들 노조가 있다.
교육감도 전교조와 무관하지 않는다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학생 체벌과 학내 민주화에 엄청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많은 부작용을 토로하던데 그 많은 학교와 학생들 중에 학내 민주화를 빌미로 문제를 일으키는 인원이 얼마나 되는가?
일부 문제아 때문에 전체 학생들의 인권을 희생하라는 얘긴가?
학생이 더구나 어린 초등생이라면 더 말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학생이 자기 돈벌이 수단이요 화풀이 대상이라도 된다는 얘긴가?
그 어린애를 내 동댕이치고 발로 차고... 아직도 이런 선생이 존재 한다는 것이 그런 선생을 겪었던 과거가 있는 나로서는 너무 마음이 아플 뿐이다.
선생은 선생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 선생을 해야 한다.
왜?
굳이 그런 의문 부호가 필요한가?
인성을 완성도 파괴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선생이기 때문이다.
선생으로 잘 해보고 싶었고... 꿈을 주는 선생이고 싶었지만...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난 그럴 자신이 없어 선생임용을 포기했다.
정말이지 선생은 숭고한 사명감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선생의 서랍 안에 필요한 것이 두툼한 하얀 봉투들이 아니라 얇은 울긋 불긋한 사랑한다, 존경한다는 학생들의 애정어린 편지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