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황장엽의 숨겨진 남한 부인과 아들… 수년간 추적했다!
레이디경향 |
ㆍ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가족 비화 공개
지난 10월 10일,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현재 그의 주검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사망 소식 후 새롭게 떠오른 이슈가 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남한의 부인과 아들이다. 50대 초반의 부인 엄씨는 현재 서울 강남에 6층짜리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등 상당한 재력가로, 아들은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서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생전의 황씨와 엄씨는 세 사람이 가족 관계인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관계를 수년 동안 추적하면서 깨알같이 적은 취재수첩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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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이곳에 와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소.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황장엽씨와 엄씨,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 비서로 인연 맺어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01년 가을, 평소 알고 지내던 취재원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황씨에게 국내에 숨겨진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황당한 소리로 치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황씨는 일흔을 훨씬 넘긴 고령인데다 망명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취재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황당한 소리로만 들리던 일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때 취재원이 말한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황씨가 망명한 지 얼마 안 돼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당시 황씨는 국가정보원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개입하지 않고는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고, 자연스럽게 사실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물론 황씨의 여인도 국가정보원이 따로 관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국가정보원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북한의 암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다 언론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기사화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여인의 주변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드러났을 확률이 높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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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국가정보원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외부 활동에 강한 의욕을 보였던 황씨와 다소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담당자들은 황씨의 사생활 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담당자들 입장에서는 황씨의 신변 안전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 여인과 아들로 인해 황씨의 동선이 외부에 알려지면 큰일 날 일이었다. 국가정보원에서는 모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씨가 그 여인을 만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단편적인 소문을 종합해본 결과, 그 여인이 국가정보원에 파견 나온 검사의 소개로 황씨의 비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여인을 소개받은 황씨가 직접 비서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사실 정보기관의 전례로 봐서 황씨 같은 거물급 망명 인사의 비서로 외부 사람을 들인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업무적인 비서라기보다는 생활적인 일을 도와주는 여자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유산 상속 문제는 '교통정리'가 된 것으로 예상
다시 9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2010년 10월 10일 언론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황씨가 오전 9시 30분경 서울 강남구 논현동 안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10월 19일 공식 브리핑을 통해 "고인은 발견 하루 전 반신욕 중 심장 질환에 의해 자구력을 상실하며 사망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언론은 이후 그의 유산 상속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황씨가 망명할 때 적지 않은 돈을 갖고 들어온 것은 물론 정부와 각계의 후원금, 각종 강연료, 출판물 인세 등 상당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인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황씨의 수양딸과 함께 사망 직후 언론 보도로 그 존재가 분명해진 사실혼 관계의 부인과 아들에게로 모아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고인의 유가족으로는 '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숙향씨가 유일하지만, 사실혼 관계의 부인이 있어 유산 상속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어 부인을 잘 아는 지인의 말을 빌려 "황씨는 사후 자신의 재산을 일단 수양딸에게 넘긴 뒤 부인과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여졌다.
그러나 취재 결과, 언론의 보도와는 다른 사실이 발견됐다. 황씨의 부인 엄씨는 이미 상당한 재력가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엄씨가 황씨를 만나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주변의 전언을 감안하면, 황씨의 적지 않은 재산이 이미 부인에게 '양도'되었을 가능성도 높았다. 또 87세의 고령인 황씨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상속 문제를 이미 '교통정리' 해놓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실제 최근에 다시 연락이 닿은 앞서 언급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 같은 가능성과 추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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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앞에서 '황장엽 아들 낳았다'고 말해
최근 황씨와 그의 부인 엄씨에 관한 보도가 이어진 직후 필자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취재수첩을 들춰보았다. 취재수첩에는 황씨 부인과 3년여 동안 '숨바꼭질' 취재를 벌였던 과정이 깨알처럼 기록돼 있었다. 거기에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부인의 강한 의지가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다음은 3년여 동안 부인의 서울 양재동 소재 아파트와 그녀의 소유로 돼 있는 논현동 빌딩 등에서 수차례에 걸쳐 대화를 나누거나 전화 통화를 한 내용을 일문일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황장엽씨에 대해 알고 있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난 모른다. 왜 나한테 그 사람에 대해 묻나?"
- 북한의 전 노동당 비서로 우리나라에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다.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글쎄, 난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을 잘 안 봐서 그 사람에 관해 알지 못한다."
- 황씨와 관련해 취재를 하고 있다.
"그 사람 일을 왜 나한테 물어보나?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거 아닌가. 왜 자꾸 연락하고 사람을 괴롭히나?"
-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계속 전화하고 찾아오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이건 사생활 침해다. 더 이상 날 찾지 마라."
- 황씨 취재를 하다가 당신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확인은 무슨 확인을 하나. 난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 마라."
- 당신이 황씨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군지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라. 계속 이러면 나도 생각이 있다."
부인은 황씨와 관련된 말만 나오면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였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소문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방향으로 흘렀다. 무엇보다 엄씨가 황씨의 비서가 된 과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엄씨의 주변과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취재에 돌입했다. 취재 과정에서 엄씨와 몇 년 동안 수차례 만났다는 지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 지인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처음에는 친구 소개로 만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 친구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당찬 구석도 있었다. 과거 무슨 미인 대회에 출전했다고 들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꾸미고 다니지는 못했지만 눈에 띄는 미인형이었다. 그런데 취직을 했다며 사라지더니 3년쯤 지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도 놀라웠지만, 그 아이 아빠가 '황장엽'이라는 게 충격적이었다. 친구들이 믿으려 하지 않자, 그녀가 자세히 설명했다. 황장엽의 비서로 일하다가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기관의 아는 사람을 통해 비서로 들어갔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예전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귀티까지 흘러 모두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이후 그녀는 다시 소식이 끊겼고, 강남에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들을 수 있었다."
한 빌딩에서 부인은 음식점을, 황씨는 연구소를 운영
엄씨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것은 2001년 가을. 지인의 증언대로 서울 양재동의 한 아파트에서 친정어머니,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1998년 가을에 이 아파트를 매입해 이사를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 온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아들 출산과 산후조리를 위해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게 수차례에 걸쳐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자신이 '엄OO'인 것은 인정했지만 황씨와의 관련설은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엄씨가 다시 취재수첩에 들어온 것은 지난 2003년, 황씨가 강남에 개인 연구소를 차렸다는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황씨가 운영하는 연구소라면, 분명 그녀의 동선과도 겹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수소문 끝에 찾은 곳은 논현동의 한 빌딩. 황씨가 사망 이후 언론에서 언급된 엄씨 소유라는 논현동 그 빌딩이었다. 단지 다른 점은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 달리 5층이 아닌 6층이라는 점.
대지 90여 평에 연건평 270여 평의 이 빌딩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규모였다. 2003년 7월에 세워진 이 빌딩의 소유주는 엄씨로 돼 있었다. 그녀는 2001년에 대지를 매입했는데, 같은 시기 황씨가 대지에 대해 가등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그러다 빌딩이 세워진 이후 소유권이 넘어갔다.
엄씨는 빌딩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 빌딩의 1층에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2004년 10월에는 자본금 5억원의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빌딩 6층에 북한 관련 연구소가 들어와 있다는 빌딩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즉 1층에선 엄씨가 음식점을, 6층에선 황씨가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엄씨는 아들을 낳기 전까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억원대의 아파트와 수십억원대의 빌딩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장엽이란 힌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풀기 쉽지 않는 난제로 남아 있다. 이후 그녀와 몇 번 전화 통화를 하고 빌딩 앞에서 부딪혔지만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비극적인 가족사'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정립하며 권력을 손에 쥐었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하지만 남한에서는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망명객 신세를 면치 못했다. 더욱이 황씨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으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남한에 있는 부인과 아들 역시 자신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숨겨진 가족'으로 언론에 의해 알려졌을 뿐이다.
한동안 황씨와 엄씨의 동선이 겹쳤던 논현동 빌딩을 다시 찾았다. 음식점은 예전과 다름없이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고, 빌딩은 외관상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빌딩 소유주는 여전히 엄씨 앞으로 되어 있지만, 그곳에서 그녀와 아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엄씨의 가족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평소 황씨는 친모의 성을 딴 '늦둥이' 아들 엄군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엄군은 어렸을 때 연고가 있는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가족을 돌봤던 엄씨, 황장엽씨의 사망 이후 그녀의 이민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학자 출신의 북한 정치인으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2년 제5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이른바 '김일성주의'로 발전시켰다. 또 김일성 우상화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 재직 기간 중 20여 차례에 걸쳐 30여 개국을 순방해 외국에도 잘 알려졌다. 그는 북한에서 부인 박승옥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황씨는 1997년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아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남북간의 극한 대립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망명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97년 4월 필리핀 특별기편으로 국내에 입국했다.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위급 인사였다. 황씨는 망명 후 1997년 12월부터 국정원이 운영하는 통일정책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았고, 북한문제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 북한의 인권 상황을 폭로한 책과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탈북자단체 관계자들과 '북한민주화동맹'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펼쳤다. '황장엽씨 안가 근처에 있는 6층짜리 빌딩이 부인 명의로 되어 있다. 유산 분쟁 소지는 없을 듯. 유산 상속 문제는 마무리되었고, 나머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끝낼 것으로 보인다' |